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 근현대소설 100선’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온전하지 못한 리얼리즘-<전투>, <철야>
<전투>는 학교를 그만두고 ‘만두 장수’로 나설 수밖에 없는 순복이의 사정을 그린다. 이 작품의 초점은 순복이가 스스로 현실의 모순에 눈 떠가는 의식의 자각 과정에 놓여있다. 순복이는 가진 자들의 질서에 대해 “힘과 주먹”이라는 대항논리로 맞선다. 이 소설은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의 효과적 대비와 무산계급 간의 연대의식을 통해 계급 이데올로기와 투쟁의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현실적 추동력을 상실한 비현실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철야>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인생 문제의 핵심이 계급 대립이고 그 해결은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자각에 이르는 과정이 간단하다. 이 느닷없는 개안과 다짐은 객관 현실에 대한 구체적 탐구에서 시작하지 않고 주어진 선행 이념으로 현실을 재단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듯 회월의 소설은 객관 현실의 구체적 탐구와 형상화를 배제하고 추상적 이념만을 깃발처럼 휘두르거나, 객관 현실의 파편적 현상들에 매몰되어 현실의 전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두 극단의 파열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호소력 있는 내면 심리묘사-<산양개>
<산양개>의 정호는 축재(蓄財)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찬 인물로 “재산 보호”를 제일의 가치로 여기며 일체의 기부와 구제를 거부한다. 자신의 재물을 도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사냥개’를 사들였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키우던 사냥개에게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여기서 정호가 홀로 적막한 밤을 보내며 겪는 공포와 불안의 내면 심리 묘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겪는 공포와 불안 심리는 외부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돈을 노리는 ‘보이지 않는 시선’을 스스로 상상하는 데서 기인한다. 정호는 누군가가 자신을 해치고 금고를 훔쳐갈 것이라고 상상하고 그러한 상상이 실제로 일어날 것과 같은 실감나는 환상으로까지 치닫는다. 자본가의 내면이 만들어낸 공포의 드라마라 할 법하다. 요컨대 자본가의 일그러진 탐욕이 바로 불행의 씨앗이라는 것, 그래서 ‘도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있다는 것(“양심의 도적”)을 냉정히 제시하는 것이다.
무산계급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지옥순례>
<지옥순례>는 경성의 변두리 동네 빈민인 칠성 아버지(진달)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떡을 강제로 뺏어 먹고 떡 파는 아이를 죽이게 되는, 프롤레타리아의 자기 파멸의 이야기다. 하지만 진달의 살인을 비인간적인 외적 상황에 돌림으로써 윤리적 ‘옹호’를 피력하고 있다. 이렇게 ‘단죄/옹호’로 갈라지는 시선의 차이는 무산계급의 승리를 위해 복무한다는 박영희 혹은 카프 문학의 운동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박영희는 <지옥순례>의 결말에서 ‘지옥의 순례’라는 상징적 어구를 통해 그들의 삶이 ‘지옥’과 다름없으며, 그것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참혹한 현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때문에 칠성이네가 겪는 비극성은 그들이 기갈에 못 이겨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다는 데 있지 않고, “빈궁의 지옥”이든 “테형의 지옥”이든 그들이 존재하는 어떤 곳이나 ‘지옥’이라는 절망적 통찰에 있다고 하겠다.
‘인간다움’의 가치-<포도원에서>
<포도원에서>는 궁핍한 계급적 생활상이 드러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다른 작품들처럼 계급의식과 투쟁을 고취하기 위한 동기로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경을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소시민의 긍정적인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아픈 홀어머니를 모시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영자의 남루한 처지와 그녀에 대한 삼봉의 애정을 통해 ‘약자’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 그리고 ‘인간다움’에 대한 가치 지향을 그려내고 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유난히 삼봉과 영자의 애정 문제가 주된 플롯을 차지한다는 점이 변화를 가늠하게 하지만, 그보다 더 강조되고 있는 것은 ‘인간다움’의 가치다. 영자 어머니의 장례를 도와주면서 느낀 삼봉이의 “마음의 기쁨”은 남녀의 애욕의 차원을 넘어서는 숭고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고통의 ‘웃음’으로의 승화- <동정>
<동정>에서는 가벼운 ‘웃음’을 통해 삶의 고통을 감내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빠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늙은 부모의 봉양과 생활고를 혼자 떠맡게 된 여자의 이야기이지만, 세상에 대한 원망과 한탄을 사기꾼이 던져준 허탈한 ‘웃음’으로 대신 넘기고 있다. 1925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충격을 주는 신경향파적 강도가 낮게 설정된 것, 그리고 부제에서 보듯 ‘이야기’의 성격이 강화된 것은 일반 여성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재지(<신여성>)의 성격에 주목한 결과라 하겠다.
200자평
박영희는 무산계급의 궁핍하고 비참한 현실을 부각시킴으로써 현실적 부조리와 모순을 전달하고 투쟁 의식을 고취한다. 그의 작품들은 계급문학과 프롤레타리아의 저항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제시하며 또 다른 지평을 열었다.
지은이
회월(懷月) 박영희는 1920년대 계급주의 문학운동단체 카프(KAPF)를 주도한 문예비평가이자 소설가다. 그는 1901년 서대문 천연동 69번지의 중산계급 집안에서 출생했다. 팔봉 김기진과 배재고보 같은 반에서 수학했다. 3·1운동 때 배재고보 학생들의 독자적인 만세운동 시 장용하, 김기진과 함께 검거되었으나, 장용하만 1년형을 받고 두 사람은 석방되었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수학하다가 가정 사정으로 인해 1921년 귀국했다.
한편 박영희는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 시 전문지의 효시인 <장미촌>의 동인으로 참여한 바 있고, 1921년 나도향 등과 <신청년> 동인으로 활동했다. 이듬해 <백조>가 간행되었는데 이 동인지는 <장미촌>의 노자영, 박종화와 <신청년>의 나도향, 이상화, 현진건, 홍사용 등이 중심이었다. <백조>를 통해 <미소의 허영시>, <환영(幻影)의 황금탑>, <월광으로 짠 병실> 등을 발표하며 감상주의적·낭만주의적인 탐미적 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으나 ‘병적 낭만주의’라는 김기진의 신랄한 비판을 받은 이후 이전의 ‘감상’적 경향에서 탈피해 나간다.
1923년 <백조> 3호에 김기진을 동인으로 영입했지만 결국 그와 더불어 <백조>의 해체를 주도했고, 같은 해 ‘인생을 위한 예술, 현실과 싸우는 의지의 예술을 지향한다’는 기치 아래 파스큘라(PASKYULA)를 조직했다. 1924년 회월은 <개벽>지의 문예부 책임을 맡으며 사회주의 사상과 신경향문학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후 <개벽>은 당시의 계급주의 신경향파 작가들이 집필자로 참여, 점차 사회주의, 계급주의 색채를 띠기 시작하며 경향문학의 거점(據點)이자 계급주의 문학의 활동 무대로 발전, 프로문학 운동의 전개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박영희는 <개벽>에 <이중병자>(1924. 11), <전투>(1925. 1), <정순의 설움>(1925. 2)과 <산양개>(1925. 4) 등을 발표한다.
1925년 8월 23일 카프(KAPF)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이후 프로 문학의 대표적 이론가로서 주도권을 확립했다. 1927년 당시 사회운동의 방향 전환에 따라 목적의식론을 제창해 문예운동의 방향전환을 주도했고 신간회 간부로도 활동했다. 1929∼30년 임화를 비롯한 소장파들이 도쿄에서 카프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중심적 위치에서 물러났다. 1931년 2월 제1차 카프 사건 때 검거되어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다가 1933년 카프에 탈퇴원을 제출하고 1934년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상실한 것은 예술이다”라는 유명한 선언문을 남기고 전향했다. 1934년 2월부터 1935년 겨울까지 제2차 검거사건 때 약 1년간 복역하고 집행유예로 석방된 바 있다.
그 후 사상범 보호시찰법에 의해 1938년 7월 전향자대회에 참가했다. 1939년 10월 친일문학가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간사가 되었으며, 요시무라 고도(芳村香道)로 창씨개명하여 일제의 신체제문학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1939년 10월 조선문인협회 간사가 되고, 1939년 중국 전선에 다녀와 기행문을 썼고, 1942년에는 제1차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이광수, 유진오와 함께 참가했다. 이러한 친일 행위로 인해 해방 후 민족 반역자 명단에 올랐다. 1948년경 ≪조선문학사≫를 탈고했으며 1950년 7월 공산군에 의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옮긴이
홍용희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되었고 편운문학상, 젊은 평론가상, 시와 시학상, 애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연구서 ≪김지하 문학연구≫, 평론집 ≪꽃과 어둠의 산조≫, ≪아름다운 결핍의 신화≫, ≪대지의 문법과 시적 상상≫이 있고 편저로 ≪한국문화와 예술적 상상력≫이 있다.
차례
전투(戰鬪)
산양개
철야(徹夜)
지옥순례(地獄巡禮)
포도원(葡萄園)에서
동정(同情)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문득 방 안은 죽은 듯이 고요하엿다. 진달은 또다시 외마듸 소리를 지르면서 달빗헤 더운 피가 검붉게 흰 눈 우에 떠러지는 것과 마지막 숨이 너머갈 때에 뒤집어쓰든 그 눈방울이며, 그러나 마지막 힘을 다해서 발길로 찰 때에 그만 집딴 쓰러지듯이 눈 우에 쓰러지는 꼴이 눈압헤 어럼푸이 낫하낫다.
‘아! 저 눈! 피가 흐르는 저 입과 코! 갈퀴 가튼 저 손툽!’ 하고 그는 머리를 숙으리엿다.
‘어듸로 갈까?’ 하고 그는 다시 생각하엿다.
‘가기는 어듸로 가? 갈 데가 잇나’ 하고 그는 혼자서 뭇고 대답하엿다.
–<지옥순례> 중에서